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 (문단 편집) ==== 콤니노스 왕조 시기 ==== ||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Istanbul_2009_Comnenus_Mosaics.jpg|width=100%]]|| || [[12세기]]의 [[모자이크]] 미술.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로, 콤니노스 왕조의 명군인 [[요안니스 2세]]를 묘사하였다. || [[콤니노스 왕조]]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테마 체계에 대한 문제가 수습되었고, 서방의 [[십자군 원정]]을 적절히 활용하여 제국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. 11세기 말~12세기 말[* 1081년~1180년으로 딱 100년이다.]의 [[알렉시오스 1세]], [[요안니스 2세]], [[마누일 1세]]로 이어지는 시기에 제국은 중흥기를 맞았다. 영토가 아닌 재정적인 지표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12세기 무렵 [[콤니노스 왕조]] 치하의 시기에 역사상 가장 융성하였다. 당대 기록에서 이미 고대를 넘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. 이 시기 제국의 군사력은 중앙 야전군을 4만 혹은 5만 명선까지 팽창시켜 주전력으로 삼았다. 재정 부문에서는 농상공업이 모두 골고루 발전하여 역대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. 12세기 중반에는 이미 조세액만으로 11세기 초에 맞먹게 되었고[* 이 역시 다른 나라 같으면 어떤 시점의 조세액이 한 세기 반 전의 조세액과 '맞먹는다'면 그건 명백한 퇴보겠지만, 비잔티움 제국이 11세기 초~중기의 위기를 거치며 상당한 영토를 상실했음을 생각한다면 역시 또 줄어든 영토에서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켜 영토가 더 넓던 시기와 맞먹는 조세액을 거둬들일 정도로 경제를 부흥시킨 것이니 대단하다고 평가받는 것. 중국으로 치면 북중국을 잃은 남송이 남중국 영토만으로 북송시대를 회복한 격이다.] 그 세기 후반에 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루 [[관세]]만 금화 2만 개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었다. 무엇보다도 당시의 발전상이 정부기관과는 구분되는 민간에서 주로 이루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앞에서 말한 발전상조차도 이 시기의 번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수 있다. 그만큼 제국은 '''당대 최고의 대국'''의 지위를 가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